
1976년 8월 18일. 도끼 미륵나무 만행사건으로 전군에 비상이 걸려 데프콘 2가 발령되어 전시 일보 직전까지 갔을 때 완전무장하고 경계근무 하는 그 당시 현담스님의 모습을 중앙대 사진과 다니다가 연대 본부 사진사로 있는 사진병이 본인모르게 찍어준 사진. 당시 소총이 칼빈 총, 위장망이 있었음.
저의 고향과 태어난 태몽을 알려드리고 싶은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적어 올립니다. 1954년 6월 20일 삼복더위 한창 더울 때에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도원리에서 사바세계에 몸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저의 고향은 쌀농사를 많이 지었습니다. 안흥에서 주천강까지 흘러가는 강물이 U자 형과 S자 형으로 계속 흘러흘러 가뭄이 들어도 이 물은 마르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논농사가 지형적으로 잘 될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감자나 옥수수를 산비탈에 많이 짓는 다른 면 소재지와는 달리 수주면은 영월에서도 부촌으로 요즘도 소득이 높은 지역입니다. 그 중에 특히 제가 태어난 도원리는 3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데 다들 태어날 당시 초가집인데 저희 집만 기와집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안동 김씨 김욱현이신데, 87년도에 67세로 사바세계를 떠나셨으며, 청풍 김씨 어머니 또한 84년도에 64세라는 짧은 나이에 고통 없이 평소에 원으로 앓지 않고 죽기를 발원하고 매일같이 뜻을 알던 모르던 한 시간씩 염불을 하셨는데, 원력을 세우시기를 어릴 때 친정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걸 보니 평소에 가난한 사람도 잘 도와주고 인정이 많아 자비심을 잘 베풀어 죽을 때 큰 병 없이 편안히 돌아가신 것을 목격하셨고, 시집와서 시어머니는 평안도 박천이 고향이신 이북사람인데 거칠고 욕도 잘 하시고 자비심도 없고 북한식으로 신주단지 모신다고 쌀 항아리를 다락에다 모시고 미신 신앙을 믿으셨는데, 며느리인 저희 어머니가 열여섯 살에 시집 와서 어찌나 독하게 시집살이를 시키는지 갖은 고생을 다 시키더니 살림은 넉넉해도 없는 사람 잘 도와주지도 않고 화도 잘 내고 하시더니 죽을 때 임종을 지켜보니 손발을 휘휘 젓고 고통스럽게 며칠을 신음하며 누웠다 앉았다 벽에 부딪혔다 하시다가 사바세계를 떠나가는 것을 보고 너무나 대조적인 친정 어머니 죽음과 시어머니 죽음을 보고 항상 고통없이 죽는 것이 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친정 어머니 영향을 받아 꼭 천수경을 한 독씩 하시고 회심곡도 하시고 그렇게 염불을 하시다가 평소와 같이 생활하시다가 약수터에 물 뜨러 가셨다가 뒤로 넘어지셨는데 뇌진탕으로 병원으로 옮겼더니 몇 시간 만에 가망이 없다고 하여 돌아가셨습니다. 평소에 항상 죽을 때 잘 죽는 복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기억이 나는 생생한 말씀이 어머니는 제천이 고향이신데 양반이라서 일곱 살까지 마당에 나가 놀지를 못하고 여자 아이는 집에서 놀아야 된다고 하며 글 가르치는 지금의 과외선생같이 언문(한글)과 한문을 배웠는데 아라비아 숫자(1.2.3.4)는 그때 가르쳐 주지 않아 몇십년을 모르고 살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고향은 강원도 영월인데 할아버지 고향이 평안도 박천으로 1884년 갑신정변이 났을 때 김옥균이 안동 김씨이기 때문에 3일천하로 끝나고 역적으로 몰려서 혹시 안동 김씨가 삼족을 멸함을 당할까봐 평안도 박천 땅에서 일주일을 말을 타고 금과 돈을 가지고 살던 집을 내버려두고 할머니와 일꾼들과 함께 야반도주를 일주일 동안 하여 숨어지내기 위해 지금 수주면에 정착하여 저희 아버지를 낳고 사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강원도 1세, 저는 2세입니다.
어머니께서 임신하시고 태몽을 꾸셨는데, 삼신할머니가 나타나 애기를 보더니 이 아기는 잘 길러야 된다고 하시며 아기 오른쪽허벅다리에 검지 손가락으로 꾹 눌러주고 갔다고 합니다. 그 뒤 애기를 낳은 후 한 달 정도 지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태몽이 생각이 나서 허벅다리를 보았더니 진짜 꿈과 같이 검지 손가락 측면에서 눌러놓은 것 같은 넓은 검은 점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목욕하면서 허벅다리 점을 보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가 지켜주는 가운데 사건사고 없이 잘 컸다는 생각을 스스로 합니다.
그럭저럭 커서 1974년도 영월국민학교에서 신체검사를 군대가기 전 해에 받았는데 갑종 1급을 받고 건강한 몸으로 1975년 7월 31일 입영 영장에 나와있는 대로 집결지 강릉 공설운동장으로 모이라고 하여 군대를 가는데 무섭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고 무엇인가 재밌을 것 같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군대에 대한 정보를 전혀 듣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저희 아버지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으셨고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입영열차에 올라탔는데 근래에 안 사실이지만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강원도 춘천 출신)도 제가 입대하던 날 야간 입영 열차를 탔을 것입니다. 30여년의 세월이 흘러 이 입영열차 출신으로 한 명은 총무원장 자승스님이 나왔고 한 명은 현담 스님이 나올 것을 그 당시에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만 아셨을 것입니다. 입영열차를 타고 느낀 소감은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호송병들이 군기를 잡는데 창문밖도 보지 말라 그러고 고개 숙이라 그러고 한명을 잡아서 개패듯이 패는데 살벌한 분위기 속에 웃지도 못하고 공포에 떨면서 열차가 계속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정도 지나니 다시 부드러워지고 다들 피곤한지 골아 떨어졌습니다. 한 참을 자다보니 새벽쯤 되어 조치원 역이라는 간판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침 7시 정도 돼서 논산 연무대 역에 내려 논산훈련소로 줄을 맞춰 가는데 열차서부터 절대로 동네 애들 건빵 달라고 사정하더라도 주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장정이 휙 집어던지니까 동네 애들이 쫓아가서 줏었는데 던진 장정을 발견하고 개패듯이 두들겨 패는 것입니다. 바짝 긴장되서 논산 훈련소에 들어왔더니 다시 신체검사를 한다고 수용연대에서 10일정도 대기하는데 왜 이렇게 오랫동안 훈련소 입교도 안시키고 먹고 자고 놀게 하며 장정이라는 이름으로 붙잡아두는가 생각을 해보니까 공수부대 지원하라고 모병관이 왔다갔다 하면서 멋있는 공수부대 옷에 선글라스를 끼고 설득을 할 때 답답한 장정들은 에너지가 넘쳐 공수부대에 지원하기도 하고 장기복무, 장기하사가 그 당시에는 모자랄 때이기 때문에 말뚝을 박고 하사관 학교로 가도록 하는 기간이 오랜 장정기간 이었던 것 같습니다. 건강에 이상이 없고 입대할 때와 똑같은 갑종1급을 부여받은 나로서는 드디어 12575922의 군번을 받았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그 중에 병이 발견되어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장정도 있었고 지루한 장정생활을 잘 견디고 원하는 평범한 훈련병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논산 28연대 12중대 1소대에서 훈련을 6주간 받는데 느낀점은 논산 훈련소에 왠 군인들과 훈련병들이 그리 많은지. 버글버글하게 많은 것을 시골 출신인 나로서는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훈련소 밥이 맛이 있는데 반찬은 김치 한가지, 나중에 일식3찬이라고 자대에 가서 실시되었던 시절입니다. 또 논산 훈련소에서 느낀 것은 팔도사나이가 다 모이기 때문에 다양한 훈련병을 내무반에서 만났습니다. 향도라고 학교로 따지면 반장인데 내 옆에 있던 짝이 뽑혔습니다. 중앙대학교 2학년 마치고 왔다고 하는데 학력이 좋고 키가 커서 뽑힌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내무반에 대학 다니다가 온 훈련병은 손들라고 하니 딱 한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내무반장이 하사인데 양하사라고 그 자리에서 향도하라고 시켰습니다. 이 내무반장이 엄청나게 잘생겼는데 밤에는 술도 잘먹고 낮에는 훈련병 반 죽이는 기가 막힌 사람입니다. 유급자가 나오면 안 된다고 얼마나 힘들게 들볶는지 저녁 점호 시간에 군가, 보초의 수칙, 차렷 자세의 정의, 전투 수칙 등 외우라고 하는 것을 못 외우면 반 죽입니다. 잘 외우지 못했던 나는 걸렸다 하면 죽을 것 같은데 부처님이 그 당시에 도와주셨는지 나만 피해서 옆에 애들에게 물어봅니다. 잘 외웠던 애도 더듬거리면 두들겨 맞는데 못 외운 나는 맞질 않았습니다. 어느 날 낮에 저녁 점호시간에 지적 안 받은 사람만 암기 상태를 점검하겠다고 하여 기를 쓰고 이것저것 외웠는데 진짜 점호시간에 전투 수칙을 외워보라고 하여 순식간에 당황하지 않고 술술 외웠더니 잘 했다고 합니다. 전투수칙 하나, 나는 초전에 적을 박살내겠다. 둘, 나는 공격전에 선봉에 서겠다. 셋, 나는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겠다. 넷, 나는 야간 전투에 승리자가 되겠다. 다섯, 나는 단 한발의 탄약도 아끼겠다. 그리고 자기전에 마지막으로 외우는 구호가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오랑캐! 이룩하자, 유신과업! 인화단결 취침!’ 이렇게 큰 소리로 복창하고 취침하던 시절이 박정희 대통령 당시의 유신군대라고 사상교육을 철두철미하게 받은 1257 군번들입니다. 학교다닐 때 공부못했던 내가 나도 외우면 된다는 것을 그때 느꼈고 잘 했다는 칭찬 한마디가 나도 하면 된다는 용기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성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밑천이 되어준 것입니다. 다시 그 당시 이야기를 또 해보겠습니다. 훈련소에서 강원도 사투리만 쓰다가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 사람들을 다 만나보니 너무나 특색있고 하루하루가 즐겁고 재밌었습니다. 훈련 후 짝대기 하나 이등병 계급장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짝대기 하나 이등병 계급장을 붙이고 하얀 런닝셔츠로 갈아입고 계급장이 달린 모자를 쓰고 PX에 가니 훈련병들이 ‘충성!충성!’ 경례를 붙여 주는데 장군이 된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라고 다들 생각했는데 자대가 엄청나게 무섭다는 공포감에 질린 것은 나중의 문제고 그 때는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정된 기차에 올라타고 열차가 서울로 가는데 용산역 용사의 집에 도착했습니다. 서울 출신들은 어떻게 연락해서 면회도 오고 하는데 서울에 연고지가 없는 나로서는 기대도 걸지 않고 이틀을 잤는데 다른 애들은 이곳저곳으로 다 데려갔는데 몇 명은 남아서 다시 기차를 타라는 인솔자의 말에 다시 강원도 원주로 간 것입니다. 원주 105 보충대에 갔는데 점호는 취침점호고 PX에서 막걸리도 팔고 위아래 군기잡는 사람도 없고 군인이 있는 군대가 아니고 너무 편안해서 이런곳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3일정도를 있다가 내 이름을 불러 몇 명과 함께 인솔자의 말을 듣고 다시 기차를 타고 밤새도록 가니까 강릉역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트럭에 올라타고 삼화라는 유격장이 있는 후반기 교육 받는 부대에서 대기병으로 이틀을 자고 트럭을 타고 강릉역전까지 데려다 줬는데 다시 다른 트럭이 와서 인솔자가 자기 트럭으로 올라타라고 했습니다. 더블백을 메고 트럭에 탔더니 하사도 있고 일등병도 있고 여러명이 섞였습니다. 그 중 이등병들은 강원도 병력 내 동기 7명이 논산에서부터 똘똘 뭉쳐 흐트러지지 않고 계속 같이 다녔습니다. 그 당시에는 속초 쪽으로 가는 길이 비포장 도로였는데 인솔하사가 ‘너희들은 최전방으로 팔려 자대가 엄청나게 고생하는 곳으로 떨어졌다’ 고 겁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좋은지 나쁜지 아무것도 모를때라 그냥 담담한 마음으로 갔습니다. 인솔하사관이 장난으로 말하는 말에 겁을 먹었습니다. ‘너희들은 여기가 어딘줄 아냐?’ 저기 38선 양양 표시판 돌이 있는 곳을 손으로 가르키면서 ‘옛날엔 여기가 북한땅이었는데 6.25때 수복시킨 곳이다.’ 이곳은 격전지라 강릉에서 속초로 가는 기찻길은 다 끊어졌고 기차 다리 사이에 포탄자국과 총알 자국들이 보입니다. 옆에 있는 애는 진짜 북쪽으로 가는 줄 알고 표정이 달라졌는데 나는 장교 인상이 너무 좋고 경치가 너무 좋아 거짓말 하는 것 같아 주변 바다를 봤는데 세상에서 태어나 처음 보는 맑은 동해바다, 책에서만 보던 진짜 바다가 보이고 배가 보이는 데 이때 태어나 처음으로 바다 구경을 했고 배구경도 했습니다. 우리 시골은 바다도 못 보고 차도 구경을 잘 못했고 죽은 사람들이 많고 서울 구경 한번 가는 것이 지금 외국 가는것보다 더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입니다. 서울 한번만 갔다왔다 하면 온 동네 시골사람들이 그 집으로 몰려가 서울 이야기 듣고 재밌어 하던 시절이고 애들은 눈깔사탕 하나씩 얻어먹던 추억이 지금도 있습니다. 나중에 군대 가서 알았지만 유치원이라는 것이 있다는 말은 그전에는 전혀 정보가 없어 들어보지를 못했습니다. 지금도 이런 말을 보살님들에게 하면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떨어진 부대가 동해안 경비 사령부 56연대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특기는 133 F.D.C.에 포 계산병으로 되어있는데 소속은 연대 전투지원중대 4.2인치 박격포가 있는데 1소대에 배치되고 소대장은 육사 30기 이성출(현 한미 연합사 부 사령관으로 2010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이었습니다. 군대 생활을 시작하는데 강원도 사투리를 쓴다고 고참들이 감자바위라고 부르고 비탈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비탈인가 했더니 산이 많아 산비탈에 산 자를 빼고 부르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오늘은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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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인 사상, 현담 사상
1975년 9월에 자대에 배치를 받아 이등병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고참들 수발 드는 것이 그 당시에 일과였습니다. 낮에는 훈련하고 교육받고 작업하면서 틈틈이 쫄병이 해야 될 일은 식기 닦는 일, 내무반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는 일, 점호 준비하는 일, 고참들 속옷, 빤쓰까지도 세탁해 드리는데, 추운 겨울에 바쁜 시간을 쪼개서 삶기까지 해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밤에는 잠자리에 모포 깔고 아침에는 개고 그 중에서도 피곤해도 2시간씩 불침번을 서야 되고, 옷 다려 걸어드리는 일, 고참들 잔심부름 하는 일, 위험한 술심부름 하는 일부터 내무반에 한 명 한 명 성격을 파악하고 고향을 파악하고 이름을 기억하고 하는 것이 신병이 해야돼는 일입니다.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도 나는 시골 촌 출신이라 모든 것이 재밌었고 내일은 작전 나간다고 하는데 호기심에 궁금하기도 하며 적응을 진짜 잘 해나갔습니다. 얼마 안 있다가 한 달이 되었다고 월급을 1350원 정도를 주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받는 돈 봉투였습니다. 너무나 기뻤습니다. 밥도 주고, 돈도 주고, 가르쳐도 주고, 다른 애들은 군대 생활이 힘들다고 하고 어느 대대에서는 탈영했다고 하는데 저는 시간도 잘 가고 좋게 보냈습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대민지원이라고 가을이 되어 추수하는 농부들이 일손이 딸려 군부대에서 도와주러 나가는데 우리 소대가 양양군 현북면에 어느 부락을 담당하였습니다. 쌀 나락을 탈곡기 근처로 옮기고 쌓아두는 작업이었습니다. 부대 와서 처음 2주일 만에 바깥세상으로 나와보는데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려있었고 마을이 평화로웠는데 젊은 사람은 없고 나이 드신 분들만 농사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한참을 일하고 점심시간이 되어 밥을 차려놨는데 나는 작대기 하나 이등병이라고 불쌍하게 보인다며 밥 한 그릇이 다른 사람 세 배는 될 정도로 큰 사기그릇에 주는 것입니다. 그 위에 올라온 고봉이 밑에 보다도 많이 담아서 할머니가 주는 것입니다. 훈련 받을 때도 배고프고 부대 와서도 배고픈 내가 순식간에 하얀 쌀밥 한 그릇을 싹 비우는 것을 할아버지가 보는 순간에 할머니에게 저 쫄병 양반 한 그릇 더 갖다 주라고, 한창 먹을 나이라고 하여 한 그릇이 또 왔는데 순식간에 앉아서 입에다가 갖다 대니까 진짜 다 먹었습니다. 두 그릇을 먹고 나니 한 시 정도가 됐는데 여기저기서 집합! 집합! 소리가 들리며 작업 시작! 실시! 실시! 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일어나질 못하는 것입니다. 몸이 말을 안 듣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 가지고 볏짚에 기대가지고 따스한 햇볕에 긴장은 풀어지고 귀로는 집합 소리를 들었는데 일어나기는 해야겠는데 알면서도 몸이 말을 안 듣는 것입니다. 눈은 슬슬 감기고 졸음은 쏟아지고 순식간에 배가 터져 죽는다고 하더니 내가 오늘 죽는 날이로구나, 이렇게 미련하게 주는 밥 다 먹고 배 터져 죽는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는 생각이 계속 났습니다. 눈꺼풀이 계속 내려와서 그냥 잤습니다. 한 시간을 자고 나니 그때는 소화가 됐는지 일어나지는 것입니다. 이 날은 고참들은 막걸리도 먹고 기분들이 좋은 상태라 멀리서 제가 자는 모습을 터치하는 사람이 없어 무사히 매 맞지 않고 부대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때 위가 늘어난 것이 지금까지 대식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 뒤 주특기 훈련이라고 훈련을 받는데 나는 포 계산병이라 계산을 잘 해야되는데 무식한 내가 수학도 하지 못한 내가 이런 보직을 받으니 감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콤파스하고 분도기하고 고무하고 연필하고 지도에다가 좌표를 찍는다고 핀으로 그려 넣는데 갑자기 어지러워 지고 집중도 안 되고 도저히 임무를 수행해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의 운명이 부처님이 도와서 바뀌는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신병들 애로 사항을 듣는다고 소대장이 면담을 하는데 내 차례가 되었습니다. 무엇이 가장 군대 생활에서 힘드냐고 해서 나는 강원도 산골짜기 촌 출신이라 배고픈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하면서 다른 사병이 밥 남기면 버리지 말고 나한테 구걸해서 달라고 하여 배를 채운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알았다고 하고 나가보라고 하여 부대 생활을 그럭저럭 잘 했습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미군 대위를 북괴군이 도끼로 찍어 죽이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이 도끼미루나무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이 터져서 전군이 전쟁 일보직전 데프콘 3가 발령되고 2가 떨어지는 현장을 체험했습니다. 데프콘 1이 발령되면 방아쇠를 당기는 전면전이라고 합니다. 실감나는 전투 일보 직전인데 최전방 벙커에 투입되는 체험을 했는데 훈련소에서 말로만 듣고 배웠던 구호가 현장에서 적용되는 것이 오늘날 제대한 후 불교일을 하는 데에 이런 사상으로 한다는 것을 글로써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 전투 수칙
1. 나의 임무는 북괴군 격멸에 있다!
2. 나는 초전에 적을 박살내겠다!
3. 나는 공격전에 선봉에 서겠다!
4. 나는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겠다!
5. 나는 야간전투에 승리자가 되겠다!
6. 나는 단 한발의 탄약도 아끼겠다!
* 취침전 구호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공산당!
무찌르자 오랑캐!
이룩하자 유신과업!
인.하.단.결! 취침!
내무반 일석점호가 끝난 후 이렇게 구호를 외치고 5분안에 취침하는 것이 75~78년도까지 군대생활 하던 시절에 매일같이 외쳤던 취침구호입니다.
* 현담 수칙
1. 나의 임무는 부처님 정법을 보급하는데 있다!
2. 나는 초전에 외도법을 박살내야 되겠다!
3. 나는 어떤 어려움에도 원력을 세우고 불법 선봉에 서겠다!
4. 나는 끝까지 선방을 목숨 걸고 운영해야 되겠다!
5. 나는 철야 정진에 승리자가 돼야 되겠다!
6. 나는 인과법을 믿기에 단 한 푼의 시주도 아껴 쓰겠다!
이런 사상으로 지금은 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군대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 당시에 데프콘이 발령 되면 벙커에 다 들어갔고 실탄이 지급되었고 2인 1조로 행동해야 됐고, 비상 식량을 배급 받았고, 운전병은 24시간 시동을 켜논 채로 대기해야 했고, 밥도 운전석에서 먹고, 변소 가는 것만 빼 놓고는 이탈하지 못했습니다. 그날 당일 어두워지니까 제대를 앞둔 고참들은 도리어 전쟁 날까봐 겁을 먹는데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호기심 많은 나로서는 전쟁이 나도 좋고,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고, 뭐가 뭔지 모를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비상이 끝나면서 무엇인가 정신적으로 성숙해 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재미로 읽는 글
군가가 아니고 그 당시에 고참들이 회식할 때 부른 군대에서만 통하는 노래입니다.
일반인들이나 요즘 군대다녀온 모를 수 있기 때문에 기억을 더듬어서 알려드립니다.
준장 소장 중장 대장은 호텔방으로~
소령 중령 대령은 여관방으로~
소위 중위 대위는 여인숙으로~
하사 중사 상사는 하숙집으로~
이병 일병 상병 병장은 내무반으로~
준장 소장 중장 대장은 요정집으로~
소령 중령 대령은 일식집으로~
소위 중위 대위는 한식집으로~
하사 중사 상사는 중국집으로~
끗발 없는 군바리는 취사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