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현담스님 인도 성지순례 기행문
8일(월) 오전 9시 40분 대한항공 편으로 출국합니다.
사바세계는 잠시 머물렀다가 언젠가는 알 수 없는 세계로 떠나 가야되는 것이 법칙인 것입니다.
왜 태어나서 왜 살다가 왜 죽어야 되는지 모르고 바쁘다고 하며 일평생을 정진한번 실컷 못해보고 죽는 중생들이 너무 많습니다. 몸은 못 가더라도 마음은 함께하는 회원을 위하여 열심히 불보살님의 기운이 있는 성지에서 정진하고 기도하여 다겁생에 죄업장이 소멸되고 원대로 뜻대로, 모든 일이 잘되도록 신심으로 기도하고 축원하고 모시고 가는 동안거결제 위패 영가님까지 함께 성지를 참배하고 붓다가야에서 회향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축산에서는 산이기 때문에 건조하여 위패를 훨훨 마음 놓고 태울 수가 없습니다. 만에 하나 산불 발생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넓은 붓다가야에서 3월 14일 오전 11시(한국현지시간 일요일 오후2시)에 회향합니다. 반드시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마음의 세계는 똑 같은 것이기 때문에 잘 차려서 불공 잘 해드리면 그 공덕이 한량없는 것입니다. 영가들 세계는 눈으로 먹고 생각으로 먹고 냄새로 먹는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있고 과학이 발달된 요즘은 인도까지 6시간이면 날라 가지만 1,300년 전 당나라때 서유기의 주인공인 삼장법사 현장스님은 17년에 걸려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였던 기록이 아직까지 남아있습니다.
원력을 세워 내년에는 꼭 동참하시기를 발원하시면 반드시 가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96, 97, 98, 3년을 비공식적으로 혼자 구도자의 자세로 인도를 다녀 왔습니다마는 99년도부터 공식적으로 회원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경험 많은 현담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일반여행사들은 7박8일에 다녀온다는 것이 수박 겉핥기식으로 너무 고생만 시키고 좋은 호텔이 옆에 있는데도 싼 숙소로 정하고 길 막히는 코스는 2시간만 일찍 출발하면 8시간을 벌수 있는데 원칙적으로 출발한다는 것이 길이 막혀 목적지 성지에서는 밤에 도착하여 칠흑같이 어두운 성지 입구에서 입장도 못해보고 사진만 찍고 얼른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불편불만을 털어놓아도 7박8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스케줄입니다. 사람들도 짜증을 내고 고생하기 때문에 수선회는 단 한명이 가더라도 여유있게 12박 13일 일정이라야 야간이동은 없고 주간에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축산이나 붓다가야에서 불공이나 참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을 향한 원력은 변하지 않습니다. 산천초목은 변하지만 정진하겠다는 수좌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보살님이 계시는 부처님의 땅 성지순례를 무사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현 담, 최미타월, 손원식, 김무량화, 백영순 외 인연 있는
일체영가 모두를 함께 모시고 이제 순례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인도성지순례 기행문
오늘은 부처님의 나라 네팔과 인도를 향하여 떠나가는 날입니다. 집결지인 인천공항에 오전 7시 까지 모이기로 하였는데, 도착하여 보니 벌써 총 출발인원 저를 포함하여 4명과 박종호 서영항공 사장님이 나와 계시는 것입니다. 항상 매년 인도를 갈 때 마다 여비를 보태주신 박상희 보살님은 너무 바빠 사무실도 가지 못하고 온라인으로도 여비를 못 부쳤다고 서영항공 박사장님을 통하여 대신 보내고 공항에서 만나 200불을 꼭 전달해 주라는 부탁을 받고 출발도 하기 전에 만나자 마자 200불을 주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 정성, 이 공덕, 많은 사람들이 먼 길 잘 갔다오라고 한 푼, 두 푼 정성껏 보내주신 고마움에 매년 영축산에서 불공드리고 인도를 13번이나 갔다 올 수 있는 현담은 세세생생 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출국하기 전에 삼다수 물을 공항에서 90병을 사서 항공화물편으로 짐 부칠 때 부치고 나니까 속이 시원하였습니다. 인도의 물을 갑자기 갈아 먹으면 설사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물은 한국 물이 최고인 것입니다. 비행기 출국 수속을 다 마치고 대한항공 KE 695편 네팔 카투만두행 비행기를 타기 위하여 탑승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최명심화 보살님의 언니가 찾아와서 인도 문화탐방을 가는 편이라고 하면서 50불을 주는 것입니다. 저절로 오는 것은 복, 요구하는 것은 빚이라고 항상 움직이기만 하면 아는 사람을 만나고, 어디서나 돈이 생기는 것을 보면 전생이나 금생에 복이 들어오는 것 같아, 항상 고마울 뿐입니다. 부처님! 이 공덕이 영원히 시주의 은혜에 보답하도록 정진 잘하고 부처님 일을 잘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 안에는 다들 밝은 표정에 잠을 자는 사람, 이야기 하는 사람, 가만히 TV를 보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네팔로 가는 사람은 대부분이 산악, 등산복장에 동네 아줌마들, 아저씨들이 산악회 조끼를 입고 단체로 떠나는 분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드디어 네팔 공항에 도착하였는데, 짐을 찾을 때 제일 먼저 입국수속을 하는 바람에 비행기 속에 착착 짐을 넣은 관계로 맨 꼴찌로 나오다시피 하였습니다. 약 1시간 정도 기다린 것 같았습니다. 출국 전에 맨 나중에 아슬아슬하게 넣어야 나올 때는 도착하여 반대로 제일 먼저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를 만났는데, 나이는 29살 결혼해서 딸이 하나 있고, 부인은 26살인데, 대학 커플이라고 합니다. 네팔 카투만두 국립대학 고고학과를 나오고 한국어를 잘 하여 가이드를 아르바이트로 하는데, 지금은 대학원 신문방송학과를 다닌다고 합니다. 인상도 참 좋았고 한국말은 경희대학교 한국어 학당을 3개월 하고 가서, 교환학생으로 배우고 왔다고 합니다. 유창할 정도의 한국말과 한국가수 이승철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신뢰가 가는 인격을 갖춘 가이드 였습니다. 시간 일정상 국내선까지 버스로 5분거리로 이동하여 포칼라 국내선 비행기를 가이드 포함 6명이 탔습니다. 인원이 적기 때문에, 서영항공 박종호 사장님은 따라 오지 않았습니다. 출국, 입국 모든 수속 가이드 역할은 박진실심 부산 보살님이 58세 대졸출신으로 영어도 잘 하기 때문에 박사장님이 부탁하여 아무 불편 없이 업무를 착착 잘 진행하여 불편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비행기는 항상 탈 때마다 긴장이 되지만 18인승으로 바람이 불거나 안개가 끼게 되면 생명의 위험을 느낄 정도로 흔들리는 프로펠라 구형 비행기라 들리는 이야기로는 4, 5월달에는 안개가 많이 끼어서 간혹 사고도 나는데, 보도도 별로 하지 않고 사건을 축소, 은폐하여 관광객이 불안할까봐 방송에 별로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점을 아는 현담은 날씨가 흐리면 안개가 끼면 버스로 6~7시간 가더라도 생명이 우선이라 타지 못하도록 항상 현장에서 판단을 내립니다. 비행기로는 30분 히말라야가 보이는 아름다움과 내릴 때 까지는 생과 사를 체험 할 정도의 위험한 소형 비행기. 다들 표정은 밝았습니다. 30분 비행 후, 무사히 포칼라에 도착하였습니다. 동양의 스위스라고 하고 호수의 도시, 휴양도시 포칼라는 너무나 편안한 곳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우리나라 봉고차 10인승 정도의 일산 도요타 차를 타고 제일 먼저 들린곳은 티벳 마을인데, 난민들이 사는 난민촌에서 손으로 짜는 카펫을 파는 곳입니다. 쇼핑 코스로 가이드는 구경만 하자고 합니다. 5명 중에 부산보살 두분이 100불, 50불짜리 소형 카펫을 샀습니다. 가이드가 표정이 밝아졌으니 30명이 와도 한 개도 안사는 경우가 많은데, 첫날 5명중에 두명이나 물건을 사서 빵빵한 팀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볼 것도 없는 폭포같지도 않은 데이비드 폭포라는 곳에 잠시 들린 후 여정을 풀기 위하여 네팔 공주가 운영한다는 뗏목으로 건너가는 설산녹음 물이 퀄퀄 흘러가는 경치좋은 이 호텔은 오성급으로 영국 엘리자베스 테일러 여왕을 비롯하여 세계적인 유명인사들이 묵는 곳이라고 합니다. 방은 아담한 리조트 식으로 되어있고, 근처에는 풀장과 흔들의자, 그네, 잔디밭, 아름다운 꽃밭 등, 서양사람이 좋아하게끔 잘 꾸며진 곳이었습니다. 다들 이 좋은 호텔에 하루 잔다는 것이 첫날부터 기분이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녁공양을 먹으러 한국식당으로 이동하여 저녁을 먹고 다시 호텔로 들어와 멀리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하루저녁을 푹 잘 잤습니다. 새벽5시에 집결하여 일출을 보기 위하여 히말라야 설산이 한눈에 보이는 사라곶 전망대로 차량은 이동하였고, 도착하여 히말라야 설산에 비친 시뻘건 태양의 웅장함과 설산과의 조화를 똑똑하게 분명하게 다들 보았습니다. 감탄속에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고 하산하여 아침 공양을 호텔에서 맛있게 먹고, 대기하고 있던 호수를 유람하는 손으로 노를 젓는 보트를 두 대에 나누어 탔습니다. 물속 깊이가 200m는 되는 곳으로 3년전에도 이 코스로 보트를 탈 때, 나는 겁에 질려있었습니다. 한시간을 타는 관광코스인데, 왜 위험한 이런 호수에 구명조끼도 없이 타라고 하느냐고 박사장님께 이야기 하니 괜찮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왔다갔다 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움직이지 말라고 계속 명령을 내렸습니다. 뒤집어지면 죽는다고. 그랬더니 그 때도 누군가 나를 보고 스님은 겁이 많다고 그러면서 깔깔대고 보살들이 웃었습니다. 처음 코스를 짤 때부터 이부분은 빼라고 했습니다. 여행사에서는 한 곳이라도 더 보여주려고 넣자고 했고, 항상 나는 불교성지가 목적이지 이런 위험한 곳은 해당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여행사에서는 뺄 경우에는 나중에 따진다고 합니다. 다른 데서는 다 가는데 왜 날림으로 하느냐고. 그런데, 작년에도 구명조끼를 입지 않던 이곳이 올해는 입는것입니다. 그래서 착한 네팔 대학원다니는 29살 가이드에게 물어보았더니, 작년에 독일사람이 단체로 관광을 와서 이 코스에서 보트를 타고 점잖게 가지 않고 노젓는 뱃사공에게 자기가 저어 보겠다고 휘젓다가 중심을 못잡고 서있다가 뒤뚱 하다가 빠져서 죽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가 생겼다고 합니다. 그 뒤부터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처럼 구명조끼를 입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아찔했습니다. 3년 전부터 작년에도 항상 사고 날 것을 예감했던 내 느낌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무사히 선착장에 내릴 때까지 내 마음속은 항상 복잡했습니다. 중생심으로 사는 불자와 부처님 마음으로 살려고 하는 나와의 갈등은 현실속에서 양보하면 사고가 날 수가 있고, 강압적으로 하면 싫어하고 삐지는 것입니다. 무사히 성지순례는 끝마쳐야 할 터인데, 이런 마음으로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10인승 도요타 버스를 타고 천길만길 위험한 TV에 방영되었던 티벳 가는 길 차마고도와 같은 길이 네팔에도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천리 낭떠러지 길을 6시간을 달려 룸비니를 향하여 가는것입니다. 경치는 기가 막히게 좋았으나, 출렁다리도 있고 아슬아슬한 곡예운전. 이것도 졸음운전을 한 번 했다하면 생사가 왔다갔다하는 코스입니다. 운전석 옆에는 가이드가 타고 뒷자리에는 제가 탔는데, 목받침없는 시트좌석이라 불편하였습니다. 가다가 점심을 간단히 해결을 하고 차는 다시 산으로 산으로 태어나서 처음가보는 이 길입니다. 옛날에는 룸비니에서 포칼라로 오는 국도를 이용하였는데, 이 미친 기사가 30분 빠르다고 아슬아슬한 목숨 건 운전에 이 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보살들도 질렸고, 겁많은 나는 졸지도 못하고 계속 긴장속에 차를 타고 가는 것입니다. 사고가 난다 하면 부처님이 영험이었고, 가피가 없는 것이고 아무일이 없는 것은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면서 나는 태연스럽게 더 이상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어 차에 누워서 와선 하듯이 눈을 감고 누워서 참선을 했습니다. 한 2시간을 지나가니 위험지역은 벗어난 것 같아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보니 안전지대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고장난 차가 한 차선을 가로막고 있는데, 간신히 빠져나온 후에는 차가 뒤집어져 있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세상에 지구상에 이런 길이 있는가. 알면 절대로 30분 때문에 이길로 가라고 기사에게 야단쳐서라도 못 가게 했을텐데 모르고 탄 것이 후회할 수 없는 목숨 건 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끝났는가 했던 안전지대를 지나니 또 해발 2000m되는 엄청난 꼬불꼬불한 산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 마이 갓. 부처님! 어찌하오리까!
오늘은 이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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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성지순례 기행문
아슬아슬한 2000m의 차마고도를 가는 산길로 작은 소형 10인승 승합차를 타고 또 고개를 넘어야 하는 이 심정은 기가 막혔습니다. 아마 이렇게 위험한 길은 틀림없이 네팔에 안전을 추구하는 미국사람들은 배낭여행도 오지도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맞다고 합니다. 유럽사람은 호기심으로 오는데 사고가 많이 나기 때문에 미국인은 국가에서 가지 말라고 해서 입국 자체를 잘 안한다고 합니다. 산길을 차가 구불구불 대관령 고갯길처럼 올라가는데 폭은 좁고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이고 설산에서 녹은 히말라야의 물줄기는 강으로 내려가면서 천하절경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기쁨과 불안, 좋은 경치를 구경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고 30분 빨리 간다는 운전사나 가이드 말은 속지 않고 국도로 포칼라에서 룸비니로 가는 것이 정상이라는 생각을 다지고 다졌습니다. 산악 부족들은 2000년 이상을 이곳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손바닥만한 논도 보이고 옥수수를 심은 밭도 보이는데, 이 나라는 많은 민족이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 풍습이 일부다처제가 아니라 일처다부제로 여자 하나를 얻으면 5형제, 6형제가 돌아가면서 아기를 낳고 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귀하고 돈이 있어야 장가를 가기 때문에 그냥 한명 한명 장가를 보내는 것보다 합동으로 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살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지금도 옛날방식으로 산다고 가이드가 말합니다. 눈을 돌려 옆을 보니 코앞에 흔들다리가 출렁거리고 평화스럽게 걸어가는 네팔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난하기로는 두 번째라고 하지만 행복만족지수는 세계에서 1, 2위를 항상 네팔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행복은 물질순위가 아니라 자연속에서 가난하더라도 마음편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끔 산길이 어두워지면 술 한잔하고 농부들이 옆집 마을을 놀러갔다가 발을 헛디뎌 가파른 산에서 굴러 떨어져 죽는 경우도 있고, 크게 다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차는 드디어 안전한 평지로 내려오기 직전, 고장난 차 한 대가 서 있어 잠시 20분정도 기다리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더는 못 기다린다는 심정에 운전기사가 핸들을 확 틀고 고개 운전으로 아슬아슬하게 10cm를 남겨두고 천리 낭떠러지길 끝자락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소름이 싹 끼치면서 목숨은 기사 손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 하자마자 막힌 길을 빠져나와 안전한 곳으로 나왔기 때문에 나만 놀랬지, 다른 보살님들은 이 장면을 못보고 태평스럽게 있는 것입니다. 아는게 병이고, 못본게 약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차는 룸비니를 향하여 안전한 평지 사람많은 시장길을 통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금 더 달려가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룸비니 부처님 첫 번째 탄생지인 성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그동안 긴장되어 보살님들이 화장실을 못갔다와서 우리 숙소 호텔로 가려면 20분을 더 갔다가 다시 와야 한다고 앞으로 인도 성지순례 마치고 돌아올 때 머무는 호텔이라고 그곳에서 화장실만 사용하자고 하여 그곳부터 들린 다음에 볼일을 마치고 룸비니를 향하여 500m정도의 입구를 가이드는 걸어가자고 하는 것을 기분 좋게 자전거 인력거를 세대를 두명이 한대씩 1달러에 3달러로 대절하여 타자고 하였습니다. 가이드는 걷자는 것을 처자식이 있는 인력거꾼이 한 푼이라도 벌려고 땡볕에 기다리고 있는데 도움주는 것이 옳다고 돈은 내가 낼테니 타라고 하였더니 가이드가 이해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분좋게 타고 가는데 불국사 신도들 30명이 참배하고 스님 인솔아래 나오는 것입니다. 그 중에 그 쪽 팀 인솔 가이드가 수쿠라라고 50살 된 능글능글한 99년도 33명 우리팀을 인솔했던 바가지의 노련한 못된 인도 가이드를 만난 것입니다. 유창한 한국말로 나를 보고 반갑다고 하며 아는 척을 하는데 사실 이 가이드는 델리호텔에서 국제전화 한 통화를 보살님이 하는데 5달러짜리를 50달러씩 받고 물건은 무조건 바가지 씌우고 쇼핑한다고 낮에 시간보내고 밤에 늦게 길 막히는 뻔히 아는데도 고생시키고 영축산에서 파트나까지 4시간 걸리는데 염주가게에 자기 동생이 한다고 들리자고 하여 쇼핑시킨 바람에 길이 막혀 새벽에 들어가게 하고 너무나 나쁜 일을 많이 해서 다시는 상대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떠나는 날 사람들 많은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착하다고 하면 돈을 못벌어요 나쁘다고 하면 손님한텐 욕먹어도 돈 많이 벌어서 애들 학비 벌고 마누라가 너무 좋아해요 한국 속담에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성수기에 벌어야지 여름 내내 놀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어요 스님 용서해 줘요 애기가 보고싶어요 빨리 공항가요 다시는 안그럴게요 그러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에 서영항공 박사장님하고 다시는 거래하지 말자고 약속을 했는데 무슨 인연인지 인도를 갈 때마다 공항에서 다른 팀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나를 꼭꼭 만나는 것입니다. 13번 인도를 갔을 때 8번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오늘 또 불국사 팀 가이드로 만났으니, 전생 인연은 확실히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입니다. 잠깐 사이에 나는 인력거에서 불국사 스님과 내려 악수를 한번 하는데 그 사이에 수쿠라 가이드가 스님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 이렇게 방정맞게 한국 노래를 부르며 아는 척을 하는 것입니다. 저 그동안 돈 많이 벌었어요 나 한국말 구룡사 정우스님이 한국 초청해서 옛날에 연대한글학당나왔기 때문에 가이드로 돈 잘 벌어요 나는 스님 조금도 잊지 않아요 만나서 반가와요 다음에 꼭 팀 한번 넘겨주세요 이제 여행사 사장 됐어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알았습니다. 하고 잘 가라고 하며 헤어진 후 룸비니 동산에 들어섰습니다. 변한 것은 작년보다 잘 정돈되어있는 잔디밭과 마하대비사원등 깔끔하게 깨끗하게 있는 것이 눈에 띄었고, 보살님들이 사진을 기념으로 찍지를 않아 왜 안찍느냐고 하니 한 명도 사진기를 안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설마 내가 없어도 누군가 가져오겠지 흔한게 디지털 카메라인데. 이렇게 생각한 것이 결국은 사진 한 장 기념으로 찍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부처님 탄생하신 무과수 나무를 보고 마하대비사원에 들어가서 정근도 하고 참선도 하며 앉아 있는데, 수백명의 태국 스님과 신도들이 참배하러 온 것입니다. 이 줄이 다 빠지고 다시 수선회 보살님들이 참배하고 관리인 두명에게 수고비로 100루피씩 주고 바깥으로 나오니 아쇼까석주 앞에 태국 스님들이 경전을 낭랑하게 소형 엠프에 대고 독송하는 소리가 참 듣기 좋았습니다. 서서히 어둠은 찾아오려고 하면서 노을지는 룸비니 동산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평화로왔습니다. 낮에 네팔 차마고도와 같은 험한 길을 목숨걸고 온 것이 까마득한 전생사같이 느껴지며 룸비니동산에서 밤 새도록 참선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습니다만은, 어두워지면 이곳을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숙소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위험을 무릎쓰고 고생했던 승합차 네팔 기사는 다시 오던 길로 가면서 중간에 자고 포칼라로 간다고 합니다. 보통 수고비로 팁을 50달러 준다고 하는데, 나는 기분 좋게 100달러를 주면서 고맙다고 살려줘서 고맙다고 한국말로 하니까 못 알아들으면서 돈보고 싱긋싱긋 웃으면서 고개 숙여 땡큐땡큐 하는 것입니다. 인색하지 마라 이것이 나의 좌우명입니다. 호텔은 아주 편안하고 이 곳에서는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방을 배정받고 저녁 공양을 맛있게 들고 하루를 보내면서 죽고 사는 것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운전기사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일 없이 내일도 하루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하루를 보냈습니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내일은 인도 바라나시에서 출발한 버스와 인도 가이드가 오면 오전에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자기는 일단 카투만두로 떠나간다고 합니다. 자 오늘은 이만 끝. 다음에...
인도성지순례 기행문
오늘은 3월 9일 어제 네팔 포칼라에서 하루 저녁을 자고 30분 빨리간다고 산악길로 죽을 고비를 다 하여 도착한 룸비니 성지순례를 마치고 하룻밤을 또 푹 자고 본격적인 인도 성지순례가 시작된 날입니다. 아침 공양을 6시에 들고 7시 출발할 인도 버스와 가이드를 기다리고 있는 순간 한편으로 마음이 조마조마 했습니다. 서울에서 인원이 비록 총 5명이지만, 경험 많은 현담이 판단내리기를 틀림없이 여행사에서 경비 부담 폭이 35인승의 큰 버스가 나오게 되면 추가요금이 기름값이 상승되어 15인승보다 100만원이상 사용료가 올라갈 것이라고, 가격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15인승 버스처럼 작은 것이 나오면 어떻겠느냐고 출발 직전에 서영항공에서 박사장님이 상의를 할 때, 나는 단호하게 돈이 문제가 아니고 8시간 ~ 10시간 이상을 매일같이 7일간을 타야 되는데 버스가 중요하기 때문에 작아도 똑같이 일정을 진행하기 위하여 요리사도 나오고 버스도 큰 게 나오라고 확답을 받고 1인당 279만원에서 추가요금 인원이 적기 때문에 40만원씩 더 내는 것과 버스기사, 조수, 요리사, 가이드 팁은 포함되지 않은 요금이기 때문에 약 60만원꼴로 더 들어가기 때문에 일을 진행하겠느냐고 하여 사실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나의 사전에서 추가요금이나 잡부금 징수는 없기 때문에 사나이답게 부처님 성지를 100% 무상으로 모시고 갈 곳인데 그 정도 때문에 일정을 취소하고 작은 버스가 나와서 불편을 주고 먹는 것 해결을 할 수 있는 요리사마저 대동하지 않으면 처음에서부터 주보에 내질 말던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다음엔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박사장님 어떠한 경우가 있어도 큰 버스가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켜야 법력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 부담없이 진행 할 수 있도록 부산보살님과 다른 보살에게는 추가요금 부담은 출발 전부터 부담을 주는 것이 이야기 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신심당부를 했는데 혹시, 버스가 없다는 이유로 큰 버스가 안나오고 15인승이 나오면은 앞으로 어떻게 하나. 이렇게 초조하게 버스 올 시간이 다 되가니 기다렸던 것입니다. 드디어 7시가 딱 되니까 으리으리한 최신형 인도 최고급 디럭스 버스가 도착하였습니다. 5명 때문에 좋은 버스가 나오는 것이 보살님들이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네팔에서 10인승 버스를 타서 뒷의자 목 받침도 없어 고생하며 탔던 것을 생각할 때 다들 또 작은 버스가 나오면 답답하고 전망도 안좋고 짜증스럽고 고통스러워하면 어떻게 하나, 신경을 썼던 나로선 약속대로 큰 버스가 오니 제일 반가웠던 사람은 현담이었던 것입니다. 반갑게 인도 가이드와 악수를 하고 따라온 요리사가 29살 청년인데 아들 딸이 둘 있고 부인이 있어 총각들과 달리 프로정신으로 음식을 잘 하는 요리사라고 가이드가 소개를 하는 것입니다. 인상도 좋고 서영항공에서 준비해준 양념등을 요리사에게 주고 차 출발 직전에 이제 우리는 네팔 국경선을 향해 떠나기 직전 다시 네팔가이드 대학원생은 7일 후 우리를 만날 때까지 카투만두로 떠나가서 시간을 보낸 다음에, 마중나온다는 것입니다. 헤어지기가 섭섭해 하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이 일단은 헤어져야 하기 때문에 50불을 주면서 진짜 팁이 아니고 올라갈 때 밥 먹으면서 가라고 먼 길 가는데 고생스러울 거라고 하며 용돈을 주었습니다. 가이드가 포칼라에서 카펫 2개를 산 부산 보살님 짐을 자기가 손으로 들고 네팔에서 만나면 사무실에 두었다가 전달해 주겠다고 하며 헤어졌습니다. 차는 올라타자마자 출발을 하는데, 에어컨도 잘 나오고 아주 정리정돈이 잘 된 깨끗하고 쾌적한 좋은 버스가 나왔습니다. 기사와 조수가 다 노련하고 인상이 좋은데 우리의 일정을 책임질 인도가이드는 인상도 별로고 느낌도 별로였습니다. 업장이 약간 많은 것 같이 느껴져서 반갑진 않지만 억지로 잘 만났다고 반갑다고 하며 잘 해보자고 격려해주었습니다. 나이는 29살이고 작년에 내 지갑 3천불 들은 것을 훔쳐갔던 작년 가이드 친구입니다. 본능적으로 어쩐지 업장이 무겁게 생겼다 했더니 제일 잘 아는 가이드, 착한 가이드를 보내달라고 했더니 또 이런 가이드가 왔나, 그러나 이것도 인연인데 하면서 탐탁하지 않아도 정해진 운명의 법칙으로 생각하고 7박 8일을 함께 다녀야 하기 때문에 잘 이끌어 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차는 한참을 달리다가 세시간 정도 지나 보살님들이 볼일 볼 때가 돼서 한적한 시골 밭에 내려 시원하게 해결하고 차에 올라탔습니다. 인도는 우리나라와 달리 고속도로 휴게소가 있거나 화장실이 잘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성지순례를 오게 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이렇게 해결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쑥쓰러워 하다가도 두세번 하게 되면 양산도 안 가지고 가리지도 않고 볼일을 봅니다. 차는 한참을 달려 기원정사 근처에 있는 목적지 호텔에 1시 30분에 도착하여 점심공양을 들고 짐을 풀고 조금 쉰 다음에 오후 3시 30분 기원정사를 참배하러 들어갔습니다. 가이드 군기를 잡기 위하여 정각 정시에 출발한다고 했는데 3시 45분이 지났는데도 나오질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스기사보고 가이드를 떨어트려놓고 출발하라고 하여 버스로 5분 거리에 기원정사가 있습니다. 손님을 놓친 가이드는 해고감이고 문책을 당하기 때문에 일부러 떨어트려놓은 것입니다. 정각정시 사상을 심어주고 미안하고 당황하게 해야 나머지 일정에 가이드 길들이게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입장요금은 가이드가 원래 내야 되는데 내가 100루피씩 5명 500루피를 지불하고 나중에 가이드에게 받으면 되기 때문에 돈을 지불하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항상 인도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부처님이 25안거를 25년을 이곳에서 지낸 곳이 금강경에 나오는 기수급고독원이라는 기원정사인 것입니다. 탁 트이고 넓은 수만평의 성지에 야자수 그늘이 있고 아직도 원숭이 들이 있고 부처님 당시에 쓰던 우물이 있고 부처님 방이 있고 접견실이 있고 설법했던 넓은 터가 있는 곳입니다. 잔디밭으로 잘 조성되어 있고, 해마다 인도정부에서도 투자를 많이 하여 쓰레기 하나 눈에 띄지 않고 아름다운 꽃나무와 참배객들이 잘 쉴 수 있는 그늘과 모든 것이 가장 평화롭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 성지중의 성지가 기원정사인 것입니다. 가이드가 릿삭을 타고 바로 쫓아오면 약발이 안받을 것 같아 더 당황하게 하기 위하여 그늘진 한쪽 사람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한시간 반을 모두가 참선을 했습니다. 끝날 때가 되니 가이드가 미안한지 멀쑥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다른 네팔 가이드는 참선할 때 같이 하는데 항상 인도 가이드들 중에 업장 무거운 가이드들은 참선하지 않고 지루해서 한쪽 구석에서 핸드폰을 하고 열매처럼 생긴 씹는 담배를 피고 또는 기사들과 차에서 농담하다가 들어옵니다. 인도 가이드는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데 가이드 경력 8년차라고 합니다. 산전수전 다 겪었고 때가 묻을 데로 다 묻어 한국사람 성격까지도 훤히 내려다보는 고수입니다. 나한테 딱 걸렸으니 당황하는 것입니다. 참선이 끝나고 와서 미안하니까 하는 소리가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한국사람 정확하게 출발하지 않아요. 정말 정각에 간다고 해도 다 늦어요. 이렇게 말 했는데 진짜로 정각이네요. 시간 지키겠어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래서 용서해준다고 하니, 좋아하는 것입니다. 다시 참선이 끝나고 부처님 방에 가서 간단한 예불을 하고 또 정진하였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일평생 한번 오기도 어려운 이 기원정사를 현담은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해마다 올 수가 있습니까? 올 때마다 신심이 새록새록 나고 부처님의 말씀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이 방, 부처님이 머무르시던 이 방에서 우리는 참선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앉아 있을 때 주변에는 서서히 어두워지면서 수백개의 작은 촛불을 태국스님들이 순례단과 함께 밝혀놓는 것입니다. 촛불잔치가 벌어진 것입니다.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습니다. 초 타는 그을음과 냄새가 참선하는 우리 코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좋아 보이지만 고문을 당하는 것처럼 괴로움도 느낍니다. 독경하는 태국스님과 수백명의 태국 신도들의 둘러쌓여서 참선하고 있는 우리 일행 모두 5명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지독하게 열심히 앉아서 끄떡하지 않고 한국의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태국이냐 한국이냐, 결국은 우리가 철수 했습니다. 왜냐, 관리인들이 다 내보내려고 하는데 또 모기가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내일을 위해서 호텔로 가서 저녁도 먹고, 잠도 자야 그 다음 일정을 감기 안 걸리고 몸살 안 나고, 보살님들이 지낼 수 있기 때문에 기분으로 밀어 붙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판단하고 끝맞췄습니다. 기다리던 관리인 10명이 작년에도 내가 와서 100루피씩을 줬다고 손 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도 스님들도 작년과 똑같이 동자승까지 데리고 7명 정도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띄는 사람에게는 섭섭지 않게 보시 하기로 원력을 세우고 출발한 나로서는 100루피씩 다 주었습니다.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처자식이 있는 할아버지 관리인들인데 성지를 지키는 공덕으로 부처님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 내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가는 곳마다 잘 해 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을 실천하였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문 바깥의 버스를 올라타고 5분만에 호텔로 돌아와 저녁공양을 처음으로 요리사가 맛있게 준비한 찰밥과 현지 쌀과 섞어서 지은 공양으로 된장국에 감자도 넣고 호박도 넣고 김치에 제법 한국식처럼 잘 차려서 잘 먹고 기분좋게 잘 잤습니다. 오늘은 3박 4일차 3월 10일 수요일입니다. 떠나가는 목적지는 쿠시나가라로 가는데 부처님의 열반지입니다. 길 막힐 것을 대비해서 4시에 기상하고 4시 30분에 식사, 5시에 출발입니다. 원칙은 7시 출발이지만, 출근시간에 인도도 막히기 때문에 남보다 한발 일찍 도시를 빠져나와야 일찍 도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약속한 시간에 차는 5시 정확하게 출발하였습니다. 차 안에서 새벽예불을 마치고 묵언을 하라고 하며 날이 훤해질 때까지 눈 감고 잠을 자던지 참선을 하던지 옆사람 방해주지 않게 말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들 잘 지켜주었습니다. 한참을 달려 다시 볼일을 보고 차에 올라탄 후 묵언을 해제시켰습니다. 일반 국도로 차가 가다가 앞에 공사중이라서 돌아서 간다는 것입니다. 비포장도로 비슷한 곳으로 덜컹덜컹 돌아가는 것이 그래도 빠르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가다가 운전기사가 유적지를 가르키면서 들렸다 가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원래 일정에는 없는 곳입니다. 공사중으로 인해서 돌아가다가 어딘가에서 눈으로 보았더니 아니 세상에, 성지중의 성지 부처님이 출가할 때 찬특가라는 마부와 함께 부처님께서 말을 타고 성문을 나와서 머리카락을 잘라 손수 삭발하고 왕자의 복장을 벗어서 마부에게 주고, 가사를 구해 입고 말과 마부는 되돌려 보낸 곳을 아쇼카 대왕이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성지중의 성지를 코스가 맞지 않는다고 여행사에서는 항상 빼놓는 곳입니다. 몇 년 전에도 서영항공 박사장님이 특별히 일정을 짜 넣어 주셔서 들렸던 곳을 이번에는 우연히 찬찬하게 볼 수 있게끔 공사중인 관계로 돌아오다가 성지를 순례하게 되었으니 모든 것은 부처님이 하나도 빼놓지 말고 잘 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버스에서 내려 성지로 올라갔습니다. 벽돌로 쌓여 보전하지 않아 시골 논 한가운데에 언덕처럼 만든 곳인데, 전연 이곳은 입장료도 받지 않고 관리인도 없다시피 합니다. 마을 청년 한 두명이 그냥 지키고 서 있는데, 성지를 귀한줄 모르고 탑 위에까지 발로 밟고 다니는 것입니다. 올라가보니 너무나 전망이 좋고 한눈에 논이며 밭에서 일하는 인도 농부들의 모습과 흐르는 물줄기까지 다 보이는데, 시원한 그늘에서 쉬면서 참선하는 맛은 너무나 꿀맛이었고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다른 곳을 다 취소하고 하루종일 이곳에 있고 싶을 정도로 편안했습니다. 이런 맛에 인도 성지순례를 다니는 구나. 이렇게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옛날 가이드는 이곳을 설명할 때 지금 가이드와 달리 착한 학구적인 가이드 였는데 참선도 같이 하고 불심이 있었습니다. 지금 가이드는 흰두교를 믿고 담배와 핸드폰을 너무 좋아하고 무조건 빨리빨리 내려가자고만 합니다. 그때 들은 가이드가 말하기를 이곳은 인도정부에서도 수백년동안 성지인 줄 모르고 지내왔는데, 일본 불교학자가 연구하기를, 30년동안 인도 방방곡곡을 다니며 부처님이 말을 타고 출가하여 머리를 삭발했다는 장소가 어디인가를 연구하고 답사하며 가보면은 아니고, 다시 일본 와서 산스크리트로 된 원전을 해석하고 다시 또 나와 다녀보면 또 아니고, 집념있게 30년만에 이곳을 발견하고 성지라고 세계 인터넷에 띄우고 인도정부에 알렸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옛날 가이드가 설명해주었던 것이 기억이 나서 그 학자가 일본 사람이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수덕사 방장 원담선사께서는 일본놈은 나쁜놈이면서도 좋아할 수 만도 없고 미워할 수만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 말이 기억이 났습니다. 나쁜놈이면서도 어떨때는 이렇게 성지를 죽기아니면 살기로 연구해서 발견하고 각 성지마다 여행객을 위해서 적자가 나더라도 수십년 전부터 호텔을 세워 머물 수 있도록 하여 그 호텔 이름이 Lotus Nikko 호텔입니다. 수요기에는 손님이 약간 있지만, 4, 5, 6, 7, 8, 9까지는 너무 더워 40도가 나가니 여행객의 발길이 뚝 끊어져 엄청난 적자가 나는 데도 신심으로 버틴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는 절대로 무모하게 성지에 호텔을 짓지 않습니다. 다시 내려서 차에 가기 직전 관리인 청년에게 찾아가서 100루피 팁을 줬습니다. 너무 고마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거지 몇 명에게도 잔돈 몇 푼을 주고 차에 탄 후 쿠시나가라 부처님의 열반지에 있는 니코 호텔로 잘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점심공양을 한 후 2시간 쉬었다가 열반사로 참배하러 들어갔습니다. 입구서부터 수십명의 거지와 장삿꾼이 몰려오기 시작하였고, 안에 들어가니 작년보다 정리정돈은 잘 되어 있었습니다. 한쪽 그늘에 시원한 곳을 찾아 두시간 정도 참선할 목적으로 자리잡고 앉았는데 옆에는 태국스님, 대만스님, 미얀마스님들이 참선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스님은 모기장을 낮에 쳤는데, 참선하기 좋은 눕지도 못하고 삼각형으로 된 아주 깜찍한 좌선용 모기장입니다. 텐트식으로 1인 모기장인데, 너무나 야간에 야외에서 참선하기 좋을 것 같아 눈여겨 봐 두었다가 꼭 샘플로 사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참선하고 나니까 머리도 맑아지고 기분도 상쾌했습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열반사 법당안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자리를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은 1905년 미얀마스님들이 불사를 하여 웅장한 법당을 만든 곳입니다. 100년이 넘은 건물인데 부처님상을 조성하여 신심으로 이나라에 기증한 것입니다. 그 옆에는 지금도 미얀마사원이 있습니다. 가난한 여행객이나 스님들의 숙소로도 활용되는 곳이 미얀마 사원이나 스리랑카, 태국등 사원들입니다. 한국 사찰도 있지만 들어가면 불사하라고 부담을 줘서 한국 스님들이 잘 한국 사찰을 보살님들을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쿠시나가라에도 대한사란 절이 있습니다. 누워있는 이곳 열반사는 처음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이 이렇게 크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크게 만든 것이지 부처님이 이렇게 11m씩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와불 부처님은 조금도 변함없이 황금빛으로 가사에 덮여 편안한 모습으로 우리 일행을 반기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곳과 달리 마음껏 이곳에서는 기도를 할 수 있어 준비해간 목탁으로 한국식 저녁예불과 기도를 법당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고성으로 염불도 하고 정근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참선도 하고 앉아있는 인도 스님들, 태국스님, 미얀마스님 세계 각국 스님들이 1달러 기부를 받기 위하여 습관적으로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같이 앉아 있습니다. 하루에 4~50달러는 수입이 생기고 겨울철 한국 보살님들 단체팀을 만나면 평균 100달러에서 많이는 200달러까지 생긴다고 합니다. 한국돈 천원짜리도 많이 받아 바꾸지 못해 항상 나를 보면 얼굴 아는 스님이 달러로 바꿔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스님은 반갑다고 하며 자기 명함을 주며 자기네 절 한번 들려달라고 합니다. 신발을 지키는 관리하는 인도사람은 10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나를 만났습니다. 내 얼굴을 압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나만 보면 너무 반갑다고 기쁨에 차있는 모습이 너무나 눈에 선합니다. 팁으로 1달러가 아니고 10달러를 주면은 너무 좋아 자기 동료들에게 자랑합니다. 자기를 알아준다고 많은 인도스님들, 태국스님, 미얀마스님들이 저를 둘러싸고 1달러씩 달라고 합니다. 100루피가 떨어지고 달러를 주다가 모자라 50달러 주면서 나눠가지라고 했습니다. 돈을 주는 기쁨이 왜 이렇게 좋은지 부처님! 감사합니다. 성지는 우리만 이익이 되면 안됩니다. 우리를 만나는 내 모습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모두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해탈을 하게 해달라고 나옹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실천하기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어두워져 열반사 뒤 부처님을 다비했던 다비터로 이동하였습니다. 버스로 3분 거리입니다. 어두워져서 입장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감시간이 되었다고 내일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을 잘 아는 내가 관리인에게 가이드에게 꾸어서 100루피를 팁이라고 딱 주니까 No problem 문제없다고 웃으면서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고 이제 참배하고 부처님이 다비했던 다비터에서 우리 언젠가는 이렇게 육신을 부처님처럼 버려야 된다는 것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을 보살님들에게 일러드렸습니다. 성지, 부처님의 성지, 누가 이곳을 조작으로 가짜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분명히 탄생하셨고, 기원정사에 머무르셨고, 다비식을 하신 터가 있는 이 성지는 불자라면 분명히 눈으로 보고 걸어보고 느껴보고 마음으로 체험해야 세세생생 신심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하루 잠을 푹 자고 내일은 바이샤리 유마거사의 고향을 향해 출발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
인도성지순례 기행문
오늘은 3월 11일 목요일 3박 4일차 일정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가는 길 목적지가 바이샬리로 6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인데 이 바이샬리는 유마거사의 고향입니다. 그리고 부처님 열반 후 1차 경전 결집이 있었던 곳입니다. 새벽 4시 기상, 4시 30분 공양, 5시 출발로 길 막히기 전 서둘러 일정대로 진행하였습니다. 큰 도시를 통과하려면 출근시간에는 막히기 때문에 2시간 일찍만 출발하면 5시간을 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초저녁에 일찍 자고, 일찍 출발하는 습관을 서서히 들이는 것입니다. 12시 정도가 되어 바이샬리에 도착하여 점심공양을 들려고 하는데, 마땅한 식당이 없어 가이드가 요리사와 상의해서 이곳에서는 가끔 게스트하우스(민박집)를 빌려 점심공양을 들도록 하고 사용료로 500루피정도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100루피가 한국돈으로 약 4000원정도로 계산 하시면 비슷할 것입니다. 요리사가 찌개에 갖가지 한국식 반찬에 그런대로 한끼 공양을 해결하고 게스트하우스 내부에 달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양치질을 하면서 침대와 천장 선풍기 한 대 달랑 붙어있는 방을 보고 1~2월달에 수요기에는 호텔이 없어 싸구려 팀들은 이 곳에서 하루 저녁 잔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 어떤 손님은 가이드에게 화를 내고 도저히 못 자겠다고 방방 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닥에 카펫은 술, 담배에 쩔어 100년동안 세탁한번 안한 냄새가 코를 진동하고, 마당가 근처에는 동네 개들이 컹컹 짖어대며 싸우고 소똥 냄새가 방 안까지 낮에도 들어오는데 한국사람 정서에는 도저히 맞지 않기 때문에 성질 급한 사람들은 못 자겠다고 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 곳은 시골이고 호텔은 없고 결국에는 방방 뛰던 손님도 분을 삭히지 못하다가 결국은 소주 한잔 먹고 잔다는 것이 이 게스트하우스입니다. 절대로 방 없는 1~2월달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상책인 것입니다. 싼게 비지떡이라고 불교신문에 198만원 7박8일 이런 코스로 가게 되면 하루는 이런 곳에서 자고, 이틀은 기차에서 해결하고 또 하루는 한국 절(대성 석가사 룸비니)에서 자고 삼류 호텔에서 이틀 정도를 자다가 야간 비행기를 타고 들어오는 코스입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밥통은 여행사 사장이 들고 다니고 갖은 고생을 할 수밖에 없고 가이드는 경험이 없는 실습용으로 초보 한국말을 배운 인도 가이드들이 나와 상황이 터졌을 때 수습을 못하는 것입니다. 노련하고 세련된 가이드들은 고생하는 이런 팀은 놀아도 절대로 나가지 않습니다. 보기에는 업장이 무거워보이는 우리팀 가이드지만 3일차가 되니 서서히 탁한 기운이 빠지는 것 같아 공양을 들고 나서 마음을 열고 인간적으로 잘 대해주었습니다. 친구 가이드가 작년에 나의 법복속에 들어있는 돈지갑 3000불을 훔쳤다가 경찰에 신고를 하겠다고 방방 뜨니 관광버스 차 바퀴 밑에다가 얼른 집어던지고 자기가 찾아준 것처럼 여기 있습니다. 찾았어요. 보살님 저거 지갑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여 찾았으면서도 손님 지갑 아니 스님 지갑에 손을 댄 그 가이드의 친구가 지금 우리의 가이드라는 현실에 바닥이 좁은 이 세계를 29살 우리 가이드에게 작년에 있던 일을 다 말할까 말까 하다가 참으면서 그 친구는 마음씨 상태가 약간 좀 그런 것 같다고 암시를 주니 알아듣고 자기도 같이 그렇게 취급할까봐 약간 방어적인 자세로 인도사람 다 좋은 사람도 아니고 다 나쁜 사람도 아니고 한국사람하고 똑같아요. 한국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고 좋은 사람도 있는 것처럼 이해하세요. 그 정도에서 대화는 마치고 바이샬리 아쇼카 석주가 있는 탑으로 갔습니다. 사리탑은 장엄하고 연못이 있으며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 구경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고 그늘에서 한참을 쉬고 있는데 옆에는 태국 성지순례단 100여명과 대만 스님들과 신도들이 몰려와 작은 미니 엠프에 대고 경전 읽는 낭랑한 소리가 아주 듣기 좋았습니다. 참선하고 탑을 참배하고 나니 관리인들이 손을 벌려 팁으로 또 100루피씩 두명을 주고 버스를 향해 올라타서 우리의 목적지 숙소인 파트나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다시 차 안에서 어저께 전화로 영축산 불공에 대해 준비하라고 한 사항을 가이드에게 확인하라고 시켰더니 준비가 잘 되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출발할 때 올해는 영축산서 불공을 드리지 않고 부처님이 도를 통한 보드가야에서 성대하게 불공을 드릴까 생각하고 주보에다가 먼저 발표하고 인도에 도착하였는데, 매년 하던 영축산 불공을 빠뜨리면 영험있는 영축산 신장들이 서운해 할 것 같아 다시 작년처럼 영축산에서 하겠다고 가이드에게 지시 내렸던 것입니다. 밥, 카레, 과자, 과일, 사탕, 바닥에 까는 카펫, 불공드릴 용품 등 해마다 500불에 준비해 줬는데, 3년 전부턴 100불을 올려달라고 하여 600불에 하청을 주는 것입니다. 영축산 불공을 준비하는 사람은 악명높은 가이드 수크라의 삼촌입니다. 바가지의 왕, 알면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600불을 주면 300불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기몫이라고 합니다. 300불로 차리라고 하면 150불은 물품에 쓰고 150불은 운반비라고 합니다. 영축산 생긴 이례 이렇게 외국에서 거금 600달러와 별도의 팁 200달러, 800달러면 한국돈으로도 100만원인데, 돈 아까워서 어떤 스님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항을 통역을 통하여 가이드가 전화로 바이샬리를 나와서 파트나 가는 도중에 영축산에 있는 불공을 담당하는 업자하고 통화를 하면서 요번에는 인원도 5명밖에 안되고 하니 500불에 하자고 가이드가 깎으니까 못하겠다고 안 하려면 말라고 베짱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또 가이드는 뭐라고 한참 인도말로 싸우듯이 언성 높여 말 하는데, 내가 궁금해서 무슨 이야기냐고 하니 600불로 하더라도 가이드 소개비로 100불을 팁으로 달라고 요구하니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불공비는 깎는게 아니라고 다른 가이드는 시키는 대로 하는데 너는 저절로 오는 것은 복 요구하는 것은 빚이라고 하는데, 100불을 달라고 하면 요구하는 것 아니냐며 줄리도 없고 자존심 상하게 왜 쓸데없는 통화를 하여 너 마음만 혼탁하게 만드냐고 나무라듯이 타이르니까 어디고 물건을 팔아주면 5%, 10% 주는 것인데 자기한테 한 푼도 안준다는 것이 너무 속상해서 따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세상에 불공비 콘미션 먹으려고 덤벼드는 가이드는 내가 처음봤다. 지난번 착한 가이드는 10달러를 내면서 보태라고 하는데, 너는 부처님한테도 뜯어먹으려고 업식이 그렇게 굳어버렸으니 너의 성장과정이 궁금하다.
이렇게 묻고싶은데 다음에 기분 좋을 때 묻기로 하고 말없이 그럭저럭 길 막히지 않게 갠지즈 강을 향하여 동양에서 첫 번째로 길다는 12km 다리 30리 거리의 긴 다리를 통과하기 직전 톨게이트에서 통행료를 지불하기 위하여 멈췄을 때, 몽키 바나나가 이 지역의 특산물이라서 차 앞으로 옆으로 팔러 다니는 것입니다. 사서 차 안에 보살님들이 하나씩 먹고, 긴 다리를 건너가면서 느끼는 것이 언젠가 이 다리는 성수대교처럼 무너질 것은 틀림이 없다. 4~50년 전에 교통량을 오늘날처럼 차량이 많이 늘어날 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그 많은 차가 다니면서 다리가 골병들었는데, 엄청나게 많은 짐을 실은 트럭들이 하루에 수백대씩 지나다니니 철근도 바깥으로 튀어나온 것이 보이고 사고나야 수습하는 인도식이나 한국식이나 결국은 사전에 예방은 없다고 생각할 때 나는 이 다리 건널 때 항상 무사히 건너기를 간절히 부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건너갑니다. 무사히 건넜습니다. 살았다는 생각 잘못하면 9시 뉴스에 나올뻔한 아슬아슬한 이 다리. 보살님들한테 말하면 불안할까봐 항상 혼자만 알고 넘어가는 교량입니다.
오후 4시쯤 파트나에서 제일 좋은 호텔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받았습니다. 이 곳이 옛날에는 아쇼카왕 시절 마갈타 국외 수도로 마우리왕조 국타왕조까지 1000년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곳입니다. 호텔에 저녁공양은 깔끔하고 고급스럽고 정갈하게 양식과 한식을 동시에 차려 잘 먹고 잘 쉬면서 내일 영축산에 가면 사용할 잔돈 10루피짜리를 호텔카운터에서 바꿔달라고 하니까 돈이 없다고 하여 아는 호텔 염주파는 주인이 해마다 나만 보면 서투른 한국말로 ‘여주 싸세요. 싸게 파라요. 안녕핫쎄요. 진짜 뽀리수에요. 신님, 한 개만 파라줏쎄요. 재수 있써요.’ 이러는 염주가게 사장에게 염주 몇 개 팔아주며, 200달러를 10루피 짜리로 바꿔달라고 하니, 심부름값 10달러를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0달러를 더 주고 내일 쓰기 위하여 어쩔수 없이 바꾸었습니다. 기분 좋게 일찍 와서 잘 먹고 푹 잘 자고 내일은 드디어 영산회상 부처님이 계시던 삼처전심 영축산으로 가는 날입니다. 오늘은 이만 끝.
인도성지순례 기행문
오늘은 3월 12일 4박 5일차입니다. 파트나를 출발하여 라지기르 영축산을 향하여 가는 날입니다. 6시 기상 7시 공양 8시 출발로 조금 느긋한 하루 일정입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 영축산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닙니다. 약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야간에 반대로 영축산쪽에서 파트나로 들어올 때는 8시간 아니 12시간도 걸리는 코스이기 때문에 이번 일정에서는 거꾸로 잡은 것입니다. 많은 경험에 의해 이렇게 가게 되면 고생하지 않고 찬찬히 많은 곳을 여유있게 정진도 하고 성지를 순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달리는데 창문바깥에 보이는 풍경은 아주 낙후된 시골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땅바닥에 구들도 없이 벽돌을 쌓아 지붕위에 갈대잎을 엮어서 만든 소 외양간보다도 못한 집에서 온가족이 사는 곳도 이 지역입니다. 인도의 많은 주가 있는데, 비아르주는 영축산이 있는 주입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이렇게 있는 것처럼 인도에도 자치주가 있는데, 잘 사는 추가 있고 못 사는 주가 있습니다. 주마다 통과할 때는 통행료를 내야 하는 것입니다.
치안이 가장 안 좋은 곳이 오늘 가는 비아르주입니다. 2005년도에 내 눈으로 똑똑히 마을 불량 청년끼리 싸울 때 오토바이에 구식 M1장총을 람보처럼 두 대에 두 명씩 나누어 타고 총을 실탄 장전해서 대낮에 반대파를 죽이겠다고 출동하는 모습을 보았고, 영축산에는 대낮에도 무장 강도가 나타나 일본사람이 죽은 적이 있어 10년 전부터는 무장 경찰 두 명이 영축산에 파견나와 있습니다. 치안이 안 좋은 이곳은 개인적으로 배낭여행으로 왔다면 100%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곳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행객은 비아르주에 대한 정보를 모르고 겁 없이 들어오는 경우가 간혹 있다고 옆에 있는 가이드가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요즘은 핸드폰이 있어 속전속결로 정보를 주고받아 강도가 조금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인도는 무서운 나라입니다.
부처님이 가장 좋아하시고 오랫동안 법을 펴셨던 영축산은 참선의 시초 삼처전심이 시작된 곳입니다. 시원한 영축산은 무더운 인도에서 유일한 산이 있는 곳입니다. 여름별장처럼 부처님이 계시던 방이 아직까지도 있는데, 그 당시에 2층 건물로 현재는 바닥만 남아 있습니다. 인도의 모든 중심은 영축산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히말라야의 기운이 뭉쳐있는 곳입니다. 차는 그럭저럭 벌써 3시간만에 나란타불교대학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을 들린 다음에 죽림정사를 들리고 그 다음에 하루 잔 후 영축산으로 올라가는 코스이기 때문에, 나란타대학을 왔습니다. 1500년전에 국타왕조시절에 건립되어 800년전 이슬람사람들이 침공하여 불을 지르고 파괴할 때, 얼마나 책이 많고 큰 도서관이 있었는지 6개월동안 불이 탔다합니다. 수십만평의 장엄하고 웅장한 캠퍼스가 널려있고, 야자수나무와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잔디밭으로 잘 조성되어있는 이곳은 불교의, 학문의 고향이고 중국의 법현스님, 당나라때 삼장법사 현장스님과 우리나라 신라 혜초스님등이 유학도 하고 다녀가신 곳입니다.
우리 일행은 이 좋은 나란타대학에 와서 기념사진 한 장을 사진기가 없어 못 찍고 그늘 있는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며 전경을 바라보고 나서 이 성지를 다 파괴시킨 이슬람교도들은 세세생생 박복하여 현재 이라크가 미국한테 우연히 공격을 당한 것 같아도 착한 인도를 공격했던 과거로 이라크가 초전박살날 수 밖에 없는 국가끼리의 인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리를 다시 사리탑이 있는 곳으로 옮겨 참선도 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항상 이런 성지 일평생 한 번도 오지 못하는 곳을 올 수 있는 나는 전생에 이곳에서도 살았고 나란타대학에서도 불교학을 공부했던 시절이 있기 때문에 강원도 고향은 잘 안가도 매년 인도를 올 수 있으니 인연이 아니고 무엇인가? 다시 일어나서 방사를 구경하였습니다. 스님들이 기거하던 방과 우물과 조리실로 쓰던 부엌도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다만 지붕만 없을 뿐입니다. 눈에 띄는 이곳보다 12군데가 더 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곳입니다. 천년전 학생수가 5만명, 엄청난 규모, 세계최고의 불교대학. 이곳을 오기만 하면 서울대학교 캠퍼스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 나란타대학입니다. 뜨거운 뙤약볕에 참배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와 버스를 타고 10분정도 가서 부처님, 이 최초에 계셨던 대나무가 많은 죽림정사에 도착하였습니다.
이곳은 항상 치안이 안좋아 무장 경찰들이 주둔하는데, 올해는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작년보다 불량배를 많이 소탕하여 치안이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곳은 사각형으로 된 연못이고, 거기에는 수많은 숭어나 잉어가 엄청나게 많이 살고 있습니다. 한쪽에서 한국의 비구니 노스님과 비구니 스님들이 7-8명정도 걸어가는 것을 보았고 내 옆에 염주팔러 온 인도 21살먹은 청년이 핸섬하게 잘 생겼는데, 우리 가이드와 서로 알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중국말을 잘 해 중국불자 성지순례 담당 중국 가이드 하다가 이곳이 고향인데, 요즘은 더워져셔 일이 없어 아르바이트삼아 염주를 판다고 팔아달라고 하여 10개를 20달러에 깎지않고 팔아주었습니다. 부모가 없어 우연히 중국절에서 컸는데, 그 덕에 중국말을 배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