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내(胎內)의 친밀함
“태내에서부터 시작해 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내에서 최초로 친밀함을 경험한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이 평생 다른 누군가와 친밀한 연합을 이루려는 혹은 피하려는 충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할 만큼 나는 여기에 깊은 확신을 갖고 있다.
모태는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은 온도로 둘려 있습니다. 또 평화롭고 고요한 환경이 있습니다. 쌍둥이가 아닌 이상 전용 시설을 쓰게 됩니다. 멀지 않은 곳에 어머니의 심장 박동의 멋진 리듬 즉 일종의 천연 배경 음악이 있습니다. 그 일정한 박자는 태내가 안전한 장소임을 말해 줍니다. 불안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음식물은 어떻습니까? 활력 넘치는 양분이 온종일 떨어지지 않고 공급됩니다. 단기간 내에 몸무게를 네 배 이상 늘게 하는 것일 보면 양질의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말하기는 하지만 아주 중요한 것으로, 태내에는 영적인 연대감 내지 친밀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태아는 다른 인간과 철저한 하나이면서도 여전히 자기만의 자율적인 자아가 있습니다.
태내의 경험이야말로 남녀 불문하고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새겨지는 첫인상 중 하나라는 점. 어머니와 태아, 두 사람은 하나의 유기체가 된다. 어머니는 아기의 발길질을 느끼고, 아기는 어머니의 스트레스를 느낀다. 어머니는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고 모든 것을 내줄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태내를 떠나야 한다. 이별의 시점이 오면 떠나는 자의 마음속에는 위로할 길 없는 비애의 감정이 새겨지게 된다. 그리고 그간 체내에 품어 왔던 살아 있는 작은 생명체의 안녕을 고하는 어머니도, 비록 몸은 편해진다 해도, 적잖은 비애가 있을 것이다. 둘의 관계는 공간적 관계가 아니라 신비한 영적 관계였다. 아기는 어머니의 “뼈 중의 뼈요 살중의 살” 이었다. 그러던 아기가 여자의 몸을 떠나게 되었으니, 이 이별은 출생이자 그에 못지 않게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다시는 이전과 같아질 수 없다.
남자아이는 친밀한 부분에서 훨씬 큰 상실을 겪게 된다. 남자아이가 자라나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될 때, 그 상실의 본질은 분명해진다. ‘나는 어머니보다도 아버지하고 더 비슷하다. 내 앞에 펼쳐진 인생 여정은 나를 어머니의 품에서 떼어 내 아버지의 손앞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세상에 나오니 온도가 맞지 않고 먹고 살아야 되고 남하고 잘 친해야 되고 사는 것이 힘들어 살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한계 그것도 아뢰야식 가운데 자기가 익힌 생명에 대한 습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나이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단명자는 전생에도 단명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힘들어도 한계를 극복 하는 것이 참선인 것입니다. 참선하면 연장전이 됩니다. 생명이 이것을 믿는 것이 부처님법을 따르는 신심있는 불제자입니다. 이 세상에는 꼭 필요한 사람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사람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 이렇게 3가지로 분류 합니다. 불자들도 꼭 필요한 불자,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불자 없어졌으면 하는 마구니같은 불자 불교는 믿는데 온갖 나쁜짓은 다하고 싸움붙이고 신심있는 초보자가 나타나면 나쁜길로 끌고 다니며 자기 이익을 위해 감언이설로 속여 경제적 손해를 입히는 불자인 척 하는 껍데기 불자들도 주변에 엄청나게 많습니다. 참선하는 불자들은 자기반성하는 시간이 많아 나쁜불자, 이상한 불자와 달리 다 나빳던 사람도 참선하면 좋은 불자로 되고 좋은불자는 정진하는 불자 깨치는 불자 선방에 다니고 안거를 하고 육도윤회를 면하려고 정진하는 불자들은 어머님 태중에 있던 태아처럼 부처님 품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에 가면 편안하고 선방 안이 부처님 몸안에 있는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잘 아셨지요? 선방이 부처님 몸 안이라는 사실을..
- 현담